[바라지 않아야 바라는 대로 큰다] 내 아이를 바라는 대로 키우는 방법, 남들처럼 혹은 남들과 다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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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지 않아야 바라는 대로 큰다
내 아이를 바라는 대로 키우고 싶다면

똑똑! 종례를 마친 학생들이 상담실 문을 열자 싱그러운 바람이 인다. 복도의 열기와 창문의 냉기가 난초 화분 사이를 이리저리 맴돌며 만들어내는 자연의 바람이다.
아이들은 진로·진학·적성·학습·학교 적응·교우 관계·이성 문제 등 청소년기의 다양한 고민거리를 들고 온다. 아이들은 대개 이런 문제에서 자신이 어떻게 해야 좋을지 그 답 또한 알고 있다. 이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긍정적 지지와 약간의 코칭이다.

오래 또는 여러 번에 걸쳐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경우도 있다. ‘문제 있음’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오는 아이들과 상담하는 경우이다. 꼬리표는 대개 어른들이 달아준 것이다. 이런 아이들은 상담실에 와서도 눈치를 살피며 쉽사리 입을 열지 않는다. 이런 저런 이유로 처벌을 받은 적이 있는 아이는 신경질적으로 나오기도 한다.

“저요? 원래 그런 놈이에요! 그러니까 헛수고하지 마시고 포기하세요.”
비딱한 태도의 이면에는 ‘나는 원래 그런 아이가 아닙니다. 그러니 도와주세요.’ 하는 속마음이 숨어 있다.

나는 훈계하지 않고, 친절하게 가르치는 것도 삼간다. 명령하거나 지시하거나 과제를 주지 않고, 책임이나 의무를 강조하지도 않는다. 대신에 나는 어른들이 아이에게 붙여준 꼬리표를 하나씩 떼어내는 일만 한다. 그런 것들은 생명체의 기를 빼앗는 부적과 같은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아이의 불평에 귀 기울여보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누군가 그 속상한 마음에 공감해줄 때 아이는 빗장을 풀고 마음의 문을 연다. 아무리 야단쳐도 엇나가기만 하던 아이의 태도는 이때부터 달라지기 시작한다. 간혹 상담이 잘 진행되는 경우, 아주 빠른 시일 내에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기도 한다.

“아이의 태도가 몰라보게 좋아졌어요. 어떻게 하신 거예요? 비결 좀 가르쳐주세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이 스스로 변했으니까요.”

자녀가 창의적인 인재로 성장하여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지 않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를 자유롭게 키워야 할까? 아니면 면밀하게 기획하고 통제해야 할까? 부모들은 고민이 많다

나는 자녀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존중해주며, 긍정적인 지지를 보내는 부모야말로 최고의 부모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나 자신 역시 두 아이를 키우면서 이 같은 신념을 실천하는 데 힘썼다.

혼내는 것과 화내는 것
‘혼내는 것’과 ‘화내는 것’은 다르다. 전자가 문제에 초점을 두고 합리적인 설명으로 따끔하게 일러주는 것이라면, 후자는 감정의 홍수에 빠져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감정을 폭발시킬 작정으로 아이를 혼내는 부모는 없다. 대개는 ‘화내지 말고 차분하게 가르쳐야지’라고 다짐한다. 그러나 애초에 마음먹은 대로 감정을 조절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아이를 혼내는 과정에서 2차 갈등으로 점화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아이가 입을 딱 닫고 침묵하거나, 울상 짓고 기어드는 목소리로 대답하거나, 자질구레한 변명을 늘어놓거나, 퉁명스럽게 대꾸하거나, 때로 부모에 맞서 목청을 높이거나, 그 어떤 경우든 울화통이 터질 위험성이 있다.

그렇다면 합리적으로 혼내는 것은 괜찮을까? 그렇지 않다.

성장 과정에서 부모로부터 자주 화풀이를 당하거나 혼난 아이들은 ‘베버의 법칙’에 따라 반응한다. ‘동일한 자극이 지속되면 둔감해져서 반응하지 않고, 이전보다 더 큰 자극이 가해져야 반응한다’는 것이 베버의 법칙이다. 자주 화내는 부모 밑에서 크는 아이들은 나름의 생존법을 터득한다. 언제까지 분노하는 부모에게 쩔쩔매며 살 것인가? 능력이 부족한데 어쩌란 말인가? 결국 아이는 부모의 감정적 반응을 무시하는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체벌과 호통으로 가르치면 아이들은 회피하는 법을 배운다.
논리력이 부족한 아이를 궁지로 몰아넣는 것쯤은 부모(특히 지식층 부모)에게 일도 아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했을 때, 어떤 교육 효과가 있기를 기대하는가? 부모에게 제압당한 아이가 무엇을 창의적으로 할 수 있겠는가? 강박증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청소년을 만들어놓고, 그 잘못이 아이에게 있다고 푸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실제로 혼내거나 화내지 않을 때 아이 스스로 성장하게 된다는 것은 많은 부모와 교사 들이 경험한 바이다.
부모가 아이를 다그치지 않고 자유롭게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또한 부모가 자녀보다 더 현명하다는 편견은 버려야 한다. 사람은 가르침을 뛰어넘어 학습하면서 발전하고 성숙한다. 사람은 ‘스스로 실현하는 학습의 존재’이다.

아이를 뒤흔드는 부모 강박증

초중고 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 아이들은 부모의 잔소리(강요와 통제)를 스트레스 요인 1순위로 꼽았다. 그렇지만 부모들은 잔소리하는 것을 부모의 도리요, 가정교육의 수단이라고 믿는 경우가 많았다.

“부모의 잔소리는 보약이 됩니다.”

“밥상머리교육을 하자니 잔소리가 나올 수밖에요.”

우리가 믿어온 것처럼 잔소리는 정말 교육 효과가 있는 것일까?

잔소리는 스트레스를 줌으로써 어떤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수단은 된다. 그러나 바람직한 행동을 하도록 유도하는 효과는 없거나 오히려 그런 효과를 감소시킨다고 보는 것이 교육심리학의 견해 중 하나다.

“인사 좀 해라. 하려면 똑바로 해라.” 하고 자꾸 지적받는 아이는 ‘나-인사-못한다’라는 관념 구도(도식, Schema)가 뇌에 형성된다. 그리고 같은 잔소리를 반복해서 들으면 들을수록 그 관념 구도가 강화된다.

따라서 아이는 인사하기를 더욱 어려워하게 되며, 인사를 하는 경우에도 경직된 자세를 보인다. 결국 인사를 해도 돌아오는 보상 대신 불편함만 남게 되니 인사하기를 점점 회피하게 되는 것이다.

아이가 인사성이 없다는 사실을 인지했다면 잔소리 대신에 부모가 모범을 보여야 한다. 아이가 다소 어설프게 인사하더라도 어른들이 적극적으로 받아주고 관심을 보여야 한다. 그러면 아이는 차차 용기를
내어 적극적으로 인사하게 되고, 곧 예의 바르다는 칭찬을 받게 될 것이다.

부모의 걱정과 잔소리는 아이를 위축시킨다. 부모가 걱정하지 않고 낙관할 때 아이는 허리를 펴고 멀리 볼 수 있다. 어릴 때부터 키가 작았던 나에게 아버지는 “나보다야 크겠지. 뭘 걱정이야.” 하셨다. 어떻게 하면 돈을 잘 벌 수 있을까 걱정하는 나에게 아버지는 “나보다야 잘 벌겠지. 뭘 걱정이야.” 하셨고, 어떻게 하면 훌륭한 사람이 될까 궁리하는 나에게 아버지는 “바르게만 살면 되지, 뭘 걱정이야.” 하셨다. 아버지는 듣기 좋으라고 입에 발린 말씀을 하시는 게 아니었다. 그 진정성은 어린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이는 부모의 입을 보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보고 배운다’는 교육 격언은 진리이다. 잔소리만 하고 모범적이지 못한 부모, 잔소리도 안 하고 모범적이지도 않은 부모, 잔소리하면서 모범을 보이는 부모, 잔소리하지 않고 모범을 보이는 부모. 가장 훌륭한 부모는 누구일까? 누구든 그 답은 확실하게 알고 있다.
재능 발견하기

모든 사람에게는 강점이 있다. 내 아이에게 어떤 강점이 있을지 부모가 고민할 필요는 없다. 강점은 때가 되면 저절로 발아하기 때문이다. 부모는 그저 지지하고 격려하고 칭찬하는 따뜻한 환경만 제공하면 된다. 아이의 어떤 점을 지지하고 격려하고 칭찬해야 하는지 고민할 필요도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긍정의 눈으로 보면 된다. 아이에게 약점이 많다고 생각하는 것은 부모의 오해일 뿐이다.

부모들의 대표적인 오해 중 하나는 성격에 관한 것이다. 특히 내향적인 것은 나쁘고 외향적인 것은 좋다는 식으로 오해하여 아이의 성격을 바꾸겠다고 시도하는 것은 참으로 무모한 일이다. 그러한 오해와 시도는 결국 아이의 자존감을 떨어뜨려 성장을 방해한다.

자녀교육의 처음과 끝은 아이로 하여금 ‘나는 유능하다’라는 확신을 갖도록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를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 부모 자신의 마음도 여유로워지고 아이의 자기 유능감 형성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니 모두에게 유익하다.

자기 유능감은 ‘절대적 자신감’이다. 이는 남과 비교하여 얻는 상대적 우월감과는 차원이 다르다. 상대적 우월감은 모래성과 같아서 작은 충격에도 쉽게 허물어진다. 우월감을 유지하기 위해서 평생 무언가에 쫓기듯이 살 수도 있다. 또한 우월감을 유지하지 못하면 열등감이나 패배감에 빠지기 쉽다.

자기 유능감으로 충만한 아이가 되면 순풍에 돛 단 듯이 인생을 항해할 수 있다. 누구와 비교하지 않고 자신의 잠재력을 마음껏 발휘하며 자아실현을 향해서 갈 수 있다. 자아실현에는 특별한 목적지가 없다.

바람이 부는 대로 맡겨두고 항해를 즐기는 것, 그 자체가 자아실현이기 때문이다.
집중력 만들기

“우리 애가 텔레비전을 좋아해요. 내가 집에 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책상 앞에 앉아 공부하다가 내가 나가기만 하면 텔레비전 앞으로 쪼르르 달려간다고 아내가 일러주더라고요. 안 되겠다 싶어서 아이를 불러 세웠어요. 한바탕 혼찌검을 놓았죠. 그러고는 아이가 보는 앞에서 텔레비전 플러그를 가위로 싹둑 잘라버렸어요.”

“그래서 효과가 있던가요?”

김 선생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아니요, 없었어요. 오히려 아내와 내가 일주일도 못 견디고 다시 연결했어요. 심심해서 못 살겠더라니까요.” 좌중에서 깔깔깔 웃음이 터졌다.

어디 텔레비전뿐이랴.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가세한 전자기기 삼총사는 현대인의 일상을 깊이 잠식하고 있다. 이것들은 특히 학업에의 몰입을 방해할 때가 많다. 지금 내 스마트폰도 메시지가 왔다고 징징 울며 글쓰기를 방해하고 있다.

비단 이 삼총사만 학업에 훼방을 놓는 것은 아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거리를 배회하거나 청소년이 삼가야 할 술이나 담배를 가까이하는 일, 종교나 동아리 활동에 심취하거나 연애에 넋을 빼앗기는 일 들 역시 학업에 지장을 준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은 모두 생활의 일부이기 때문에 자녀에 대한 통제권을 가진 부모라 할지라도 이를 강제로 억압하면 역효과 또는 부작용이 생긴다. 뚱뚱하니까 밥 먹지 말고 며칠 굶으라고 명령하면 ‘고맙습니다.’ 하고 순순히 받아들일 자녀가 몇이나 있을까? 휴대폰을 밥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요즘 아이들이다.

우리 속담에 ‘육곳간집 아들이 고기 싫어한다’는 말이 있다. 언제든지 먹을 수 있으니 고기에 연연할 필요가 없어서다. 마찬가지로 조건을 붙여 속박하지 않으면 스스로 절제하는 능력이 생긴다. 아이의 자아실현 경향성을 최대로 발휘하게 하는 조건은 ‘자유’이다. 자유 속에서 아이는 자신의 천재적 잠재력을 스스로 찾아내고 이를 발휘하게 된다.
최강의 학습 동기
성공에 대한 열망이 가득할 때는 집요해질 수는 있어도, 자신에게 내재된 최대치의 능력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최대의 능력은 오로지 그 일이 즐거울 때만 발휘된다.

공부나 일이나 그 자체로 즐거워서 할 때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러한 능력이 과연 자신에게 있는지 의심할 필요는 없다. 모든 사람은 천재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근래 대한민국에서는 천재의 등장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운동 천재, 바둑 천재, 연기 천재, 노래 천재, 게임 천재, 컴퓨터 천재…. 몇 십 년 사이에 특출한 재능을 가진 아이가 과거보다 더 많이 태어난 것일까? 하지만 이런 가정은 과학적인 개연성이 부족하다. 유전 정보는 쉽사리 변화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아이의 자발성과 창의성을 존중하는 교육이 확산되면서 생긴 현상이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아이는 천재의 잠재력을 지니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아이의 재능을 활짝 꽃 피우도록 돕는 방법은 무엇인가? 내 의견은 ‘최대한 자유롭게 해줘야 한다’이다.

너무 자유로워서 아이가 어디론가 훨훨 날아가버리지는 않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부모인 우리도 사회의 룰에 적응하며 살고 있고 친지나 이웃, 학교가 아이들을 통제하는 장치로서 충분히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의 생각이다. 아이들의 심리적 탄력성은 모두 달라서 동일한 통제에 대한 반응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즉, 통제를 관심이라고 여길 수도 있고, 강요라고 여길 수도 있다. 자아 성장에 따라 독립 지향성이 강해지는 사춘기 아이들은 대부분 부모의 통제를 강요라고 여긴다. 이럴 때 부모가 “너는 왜 매사를 부정적으로만 보는 거니?”하고 비난하는 것은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 부모라는 거울이 부정적이라고 말하면, 아이는 거울 앞에서 일그러진 자신을 보며 더욱 부정적인 면을 강화하게 된다.

자유는 인간과 사회를 탐색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무엇은 이래서 안 되고, 무엇은 저래서 안 되고, 이런저런 통제가 심하면 아이는 인간과 사회를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기게 된다. 두려움과 스트레스는 뇌의 활성화를 저해하여 능력 발휘를 방해한다.

공부를 위한 최강의 동기는 즐거움이다. 그 즐거움은 공부 자체가 목적일 때에 얻을 수 있다. 생존을 위해서, 안전을 위해서, 자존심을 위해서 공부해야 한다면 공부는 괴로운 일로 전락한다. 부모가 줄 수 있는 유일한 도움은 아이가 배움 자체에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공부에 조건을 달거나 스트레스를 주는 대신 자녀가 공부할 수 있는 환경만 제공하면 된다.

바라지 않아야 바라는 대로 큰다

양육 태도에 대한 원칙을 세우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딸을 키우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아내와 나는 아이 양육을 부모님께 맡겨두고 출근하는 맞벌이 부부였기 때문이다. 나는 내 할머니가 나에게 그랬듯이, 어머니가 손녀들을 무조건 품어줄 것으로만 기대했었다. 그러나 이는 단단한 오해였다. 손자 돌보기에 책임감을 느낀 어머니는 그 옛날 나를 키울 때보다 더 엄하게 아이들을 대하셨던 것이다. 아이가 조금만 실수를 해도 꾸지람하셨고 어떨 때는 위협도 서슴지 않으셨는데, 그 화살은 대부분 첫째에게로 향했다. 그러다 보니 첫애는 잘 웃지도 않고 겁이 많은 아이로 자랐다.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때가 많았으며, 유치원에 가서도 선생님 치맛자락만 꼭 붙들고 다녔다. 결국 유치원을 중퇴하고야 말았다.

어머니의 엄격함 때문에 눈치를 보며 컸던 나의 전철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딸에게까지 물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큰딸이 자신의 트라우마를 이겨내기 시작한 것은 중 2가 되면서부터였다.

“아빠, 나 재즈댄스학원 등록했어. 이제부터는 하고 싶은 거 할 거야.”

나는 딸이 대견스러웠고 웃음으로 지지와 격려를 보내주었다. 큰딸은 나처럼 권위주의를 무척 싫어하는 성품을 갖게 되었다. 학교에서는 따뜻하고 자애로운 선생님을 유난히 좋아했고 그 과목 공부도 열심히 했다. 특히 영어 선생님을 좋아해서 영어를 열심히 공부하더니 집에서 가까운 외국어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리고 고 2가 되어서는 자신의 예술적 기질을 따라 미술대학 쪽으로 진로를 변경했다.

큰딸보다 네 살 아래인 작은딸은 언니가 밟고 간 자리를 뒤따라갔기 때문에 훨씬 수월하게 컸다. 할머니도 둘째에게는 관대했기에, 아이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언니에 비해 훨씬 자유롭게 경험하며 자랐다.

“아빠, 나는 나로 태어나서 참 좋아.”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둘째가 내게 한 말이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아이의 자존감만 지켜주면 아주 잘 클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다. 놀고 싶다면 놀게 하고, 먹고 싶다면 먹게 하고, 책을 읽고 싶다면 읽게 하고, 무엇이든 마음껏 하도록 아이를 보살폈다.

최대한의 자유를 주고, 특별히 잘할 것을 요구하지 않고, 무조건 지지하고 친구처럼 지내며, 칭찬에 목매지 않는 키운다는 원칙은 아이의 ‘자아실현 경향성’을 믿고 ‘자기 유능감’을 신장시키는 데에 초점을 둔 것이다.

나는 아이와 어른을 구분하는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이나 관습에 반대한다. 그 관습 때문에 어른은 아이를 깔보거나 함부로 대하게 되고, 그 결과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아이들은 반항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자존심을 다치면 유능해지지 못한다. 유능하지 못하면 남을 이기고자 하는 일에 집착하게 되고, 그 결과 얻는 것은 허탈함뿐이다. 사람은 밥만 먹고 누워 자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냥 두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 하게끔 되어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일을 회피하게 되는 것은 비교와 경쟁에 질려버렸기 때문이다.

내 아이가 잘되기를 바란다면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 성공과 실패를 가늠하는 불편한 마음부터 훌훌 털어버려야 한다. 그리고 무엇이 자신의 의도대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지 않아야 한다. 간절히 바란다는 것은 쉽사리 이루어지기 힘들다는 전제를 깔고 있고, 그런 생각은 각종 무리와 폐해를 낳게 마련이다. 자녀교육에 관한 한 담백한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바라지 않아야 바라는 대로 큰다

(신규진 지음/아름다운사람들/2013년 9월/240쪽/15,000원)
■ 책 소개
내 아이를 바라는 대로 키우는 방법!
25년간 교직에 몸담으면서 그중 15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이들을 상담해온 저자는 진짜 내 아이가 잘되기를 바란다면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 성공과 실패를 가늠하는 불편한 마음부터 훌훌 털어버리는 마음의 준비가 우선이라고 한다. 공부 역시 그렇다. 공부를 위한 최강의 동기는 스스로 공부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순간 얻을 수 있다. 아이 스스로 공부 자체를 자신의 목적으로 삼을 수 있게, 부모는 조급한 마음을 털어버리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에게 찾아오는 그 동기마저 부모가 빼앗아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재촉하지 않아야 아이는 스스로 부모가 바라는 대로 자란다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아이의 학습을 위해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것들에 대해 현장 경험을 살린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아이의 학습에 대한 것을 포함하여 자존감을 살려주는 법, 부모와 원활한 소통을 하게 만드는 법, 아이의 자아실현을 위해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것 등 ‘내 아이를 내가 바라는 대로’ 키울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 저자 신규진
홍익대학교병설 경성고등학교의 상담 교사이자 과학 교사이다. 교직생활 25년 중 15여 년을 아이들과 학부모 상담에 힘써온 전문 상담 교사로서 4,000여 차례의 상담 결과를 토대로 『바라지 않아야 바라는 대로 큰다』라는 이 책을 집필했다. 2008년에는 전문 상담 교사들의 필독서로 손꼽히는 『아이들의 성장을 돕는 학교 상담』을 펴냈고, 2009년에는 『자퇴 상담 학교를 떠나는 아이들』이라는 저서를 통해 학업 중단 아동들의 실상을 널리 알리기도 했다. 「한국일보」와 MBC에서 발간하는 월간지 『여성시대』에 교육 칼럼을 연재하였으며, 교사가 되려는 대학생 및 대학원생 들의 특강 멘토로도 공감을 얻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과학 교사로서 아이들이 재미있어할 만한 과학책을 펴내기 위해서도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 차례
내 아이를 바라는 대로 키우고 싶다면
1. 부모와 학부모 사이
2. 문제는 안 변하는 부모
3. 혼내는 것과 화내는 것
4. 아이를 뒤흔드는 부모 강박증
5.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
6. 세심함과 과잉보호의 혼돈
7. 재능 발견하기
8. 보통 아이 최고 아이 되기
9. 집중력 만들기
10. 최강의 학습 동기
11. 고정관념에서 편견까지
12. 학부모만 걱정한다
13. 칭찬, 그 이상의 것
14. 대화법만 바꿔도
15. 정직한 내 아이를 원한다면
16. 배운 대로 사랑한다
17. 아빠라고 뒷짐 지지 마라
18. 남들처럼 혹은 남들과 다르게
19. 바라지 않아야 바라는 대로 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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